서울의 봄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리기가 힘들었습니다. 더불어 뜨거워진 1212 사태에 대해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 결과 그리고 실존인물인 전두광의 숨겨진 이야기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서울의 봄 영화 전두광 실존인물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주요 배우들 위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회로 쿠데타를 일으킨 주동자는 극 중 전두광과 노태건입니다.
- 황정민은 극중 전두광 역할, 실존인물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입니다.
- 박해준은 극중 노태건 역할, 실존인물은 노태우 9 사단장입니다.
- 정우성은 극 중 이태신 역할, 실존인물은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입니다.
- 이성민은 극중 정상호 역할, 실존인물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입니다.
- 김성균은 극중 김준엽 역할, 실존인물은 김진기 육군 헌병감입니다.
- 정만식은 극중 공수혁 역할, 실존인물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입니다.
- 정해인은 극중 오진호 역할, 실존인물은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입니다.
반란군에 맞서 싸웠던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의 사태 이후 고초와 가족들의 연이어 유명을 달리하는 안타까운 소식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서울의 봄' 정우성 맡은 장군의 끝… 실제 일가족 풍비박산 났다
1212 사태의 배경과 원인
1212 사태란1979년 12월 12일에 극 중 전두광(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건(노태우 전 대통령)이 군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으로 일으킨 발생한 대규모 군사반란 폭력사태입니다.
1212 사태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단입니다. 그 뒤에 해당 사건을 조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바로 전두환입니다.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한 후,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수사와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을 강화하려고 하며, 정승화가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우며 정승화를 강제로 연행하기로 계획했습니다.
1212 사태 숨겨진 이야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국방부 군수차관 유학성, 1 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 사단장 노태우 등이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사전에 20 사단장 박준병, 1 공수여단장 박희도, 3 공수여단장 최세창, 5 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접촉했습니다. 12월 초순에 전두환은 보안사 수사 관계자들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영화에서도 꽤나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2일 저녁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 헌병대 병력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을 제압하고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로 강제로 연행했습니다. 정승화의 연행에 저항할지 모를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습니다. 연회 중에 정승화의 연행 사실이 전해지자 육군장성들이 대응 태세를 갖추려 했지만 이미 전두환의 지시로 육군지휘부가 무력화된 상황이었습니다.
정승화의 연행 소식이 알려지자 정병주와 장태완은 수도권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대응하려 했지만, 신군부는 노태우의 9사단을 끌어들이며 대처하여 정병주와 장태완을 체포하고 반란 진압군을 무력화시켰습니다.
1212 사태 결과
군사반란이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이듬해 전두환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그다음은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2·12 군사반란의 성공으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민주헌정을 중지시키고 군정으로 회귀하려 했습니다. 이에 국민과 정치인들은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어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는 집권 세력에 의해 정당화되었지만, 그 후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였습니다.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가담, 뇌물 수수 등으로 기소되었으나 사면되었습니다.
마치며
1212 사태는 한국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서울의 봄으로 재조명된 이 사태는 우리에게 교훈과 경각심을 주었지만, 동시에 기회와 도전을 주었습니다. 극 중 전두광과 이태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잊지 않고, 반성하고, 배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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