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은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군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공산당 논란과 흉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고 있습니다. 그의 일생과 논란의 내용 꼭 알고 가셔야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꼭 기억해야 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생애
먼저 그가 태어난 시대와 배경에 대해 간단히 알아야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음력 8월 27일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농부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 살았습니다.
1895년 독립운동의 서막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은 28세인 1895년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중국의 간섭과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894년에는 일본과 중국이 조선을 놓고 전쟁을 벌인 일중전쟁이 일어났고, 1895년에는 일본이 중국을 물리치고 조선의 권리를 침탈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서 일본과 싸웠습니다. 의병은 정부나 왕의 지시를 받지 않고,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결성한 무장단체입니다. 의병들은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었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투쟁을 벌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강원도 회양에서 의병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는 사냥꾼으로서 사격술과 기지가 뛰어났으며, 의병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함경남도 갑산, 함경북도 무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가 중국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1910년 일제 식민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에 홍범도 장군은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습니다. 그는 독립군의 통합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습니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며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이어서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이 두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맞선 최초이자 최고의 승리였습니다.
1922년 공산당 입당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겪은 그는 만주로 건너가기 전에 가족들이 모두 죽고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로 돌아오지 않고, 연해주에 머물렀습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1927년 소련의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이 고려인이 일본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강제로 이주당했습니다. 키질로르다로 옮겨온 그는 거기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1943년 생의 마감
향년 76세의 나이로 타국땅인 러시아에서 타계했습니다.
2021년 유해 고국 땅으로 돌아옴
홍범도 장군은 서거 후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다시 안장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으며, 우리 역사의 영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 공산당 논란
그의 생애 중 일부 시기에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란과 반응은 정말 타당한 것일까요? 저는 홍범도 장군의 역사적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체적인 생애와 활동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그가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불공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홍범도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한 시기와 배경을 살펴보면, 그가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만주국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만주공산당이 중국공산당과 연계되어 있지 않았으며, 단지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을 이용했다고 밝혔습니다. 즉, 그는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독립운동의 목적을 우선시했던 것입니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1928년 만주공산당에서 탈당하고, 1930년대부터는 반공과 반일을 표방하면서 독립군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독립운동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광복 후에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했으며, 1948년 남북분단 이후에는 남한 정부와 협력하여 북한의 침략에 맞섰습니다.
홍범도 흉상 철거
일부 사람들은 그가 공산주의자였다고 비난하고, 그의 흉상을 철거하는 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제주 99주년 삼일절을 맞아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5명의 흉상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홍범도 장군,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인 이회영이 그 다섯 명입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위에서 언급한 공산당 가입 이력으로 정체성을 훼손한다며 철거가 결정된 것입니다. 홍장군의 흉상은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공산주의자로서 활동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공과 반일의 입장을 강하게 표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공산주의자로 비난하거나 흉상을 철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며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독립군의 지도자로서, 우리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입니다. 그의 공산당 가입은 그의 전체적인 생애와 활동에 비해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그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당하고 불공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홍범도 장군의 역사적 역할과 가치를 존중하고, 그의 흉상이나 동상을 보호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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